《어른》
2026/10/20 -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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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 일종의 가설과도 같은, 잠정적 이미지들을 갖게 된다. 그것은 어른들의 전언이나 창작물처럼, 외부에서 주어진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상한 것일 수도 있고, 설명할 수 없는 자기만의 내밀한 지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러한 불완전한 이미지들은 어른이 되어 세상을 경험하면서 교정되거나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린 시절의 상상이나 착각을 현실에 맞춰 바로잡는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어서, 둘은 나란히 병존하기도 하고, 심할 땐 후자가 전자에 의해 조건지워지기도 한다.
아마트 게이의 〈station essence au pole nord(북극의 주유소)〉는 파이프 관이나 가스 플레어로 미루어 주유소보다는 정유시설에 가까운 듯 하다. 일련의 기호와 도형, 자국으로 환원된 설비들은 주인 없는 틈을 타 일을 꾸미는 애니메이션 속 장난감처럼 분주하게 가동된다. 물론 그것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것인지는 상상에 맡겨진다. 작가는 중학교 지리 수업을 기억한다. 선생님은 북극에 매장된 에너지 자원과 그것을 추출하고자 하는 어른들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 그 계획이 현실로 도래했다는 사실보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의 머릿속에 펼쳐졌던 북극 풍경이 현실과 무관한 모습으로 생명력을 이어왔다는 점이다. 기억의 심층에서 퍼올린 이 이미지는 독특한 광택으로 번들거리는데, 화석연료에 기반한 합성수지인 PVAc를 바인더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북극 아래 묻혀 있다고 배운 물질이 지상으로 올라와, 다시 그 북극을 그리는 재료가 된 셈이다.
박선유의 〈Doubtful〉은 화면 중앙에 어떤 형상이 있다. 대사 없는 말풍선, 분홍 알을 품은 조개류, 아니면 그저 어떤 공동(cavity)의 윤곽일수도 있겠다. 이 형상을 무엇으로도 특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누구나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작가의 지각 안에서만 나타나는 어떤 상을 가리키고 있어서다. 어린 시절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런 이미지들이 작가의 지각에 나타나는 빈도는 줄어들고 있는데, 이는 그가 현실만을 충실하게 수용하도록 길들여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지각의 모호한 성질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면 하단의 알약 껍질이나 약포지를 펼쳐놓은 듯한 흰 천은 개인사를 암시하는 자전적 정물이기보다, 지각된 것의 출처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검토한 흔적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에게 나타나는 상은 약물에 의한 착시일수도, 반대로 약물로 교정해야 할 내부의 증상일 수도, 어느 쪽도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형상을 지각한다는 사실이 그 출처까지 보증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작가가 가진 의구심이다.
자화상을 예감하게 하는 제목과 달리 장예빈의 〈Me〉는 ‘나’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림은 실내의 한 벽면을 보여줄 뿐이어서, 세밀하게 묘사된 벽타일과 거울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일각에서 ‘거울 단계’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유아기를 지나며 거울 속 이미지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거울 속 나’가 ‘나’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때때로 익숙한 내 몸이 나로부터 분리되어, 왠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해 말한다. 내 거울상과 나의 연결이 느슨해지는 소격의 감각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거듭해서 되짚게 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 존재를 확증할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은 경우에 따라 내 모습을 낯설게 만들어 돌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거울 앞에 선 자도, 거울 안에 비치는 자도 증발된 자리에 남은 것은 뿌옇게 흐린 거울의 표면이다. 그것은 얼굴이 아님에도 마치 얼굴인 것처럼, 어딘가 웃고 있는 표정이다.
츠치토리 후미카의 〈20210913〉는 원하는 농도가 될 때까지 물감을 문지르고 펴바른 팔레트의 흔적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더블 포트레이트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이른바 '쇼죠 망가'를 보며 세상을 배웠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그의 회화는 순정 만화처럼 언제나 그 중심에 한 쌍의 커플을 등장시킨다. 다만, 인물의 신체가 뚜렷한 윤곽선으로 구획되는 망가와 달리 츠치토리의 회화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가 지워지고 뒤엉키며 누가 누구인지 식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인물의 주변을 소프트 포커스로 날리거나, 반짝이는 별, 흩날리는 꽃으로 수놓아 연애 무드를 고조시키는 망가 문법을 뒤집어, 오히려 감정의 주체인 두 사람의 형상 자체를 해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신체보다 두 신체 사이의 충돌 내지는 관계성이 성립하는 방식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트 게이(b.1995)는 벨기에 라 캉브르 국립고등시각예술학교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브뤼셀의 트리파제(Triphasé)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에프레미디스(2024,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주요 그룹전으로는 Au Passage(2026, 파리), David Horvitz(2024, 로스앤젤레스), ISELP(2022, 브뤼셀), CAB 재단(2022, 브뤼셀), 유럽의회(2022, 브뤼셀), Zaza(2022, 밀라노) 등이 있다.
박선유(b.1995)는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 전공으로 학부와 석사를 졸업했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석박사통합과정에 재학 중이다. 주요 그룹전으로는 프레임성수 (2024, 서울)가 있다.
장예빈(b.1997)은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학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25, 서울), 교보아트스페이스(2025, 서울), 핌(2025, 서울), 유머감각(2024, 서울), 온수공간(2023, 서울), 디스위켄드룸(2022, 서울) 등에서 단체전에 참여했다.
츠치토리 후미카(b.1995)는 교토예술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화를 전공했다. 니혼바시 미쓰코시(2024, 도쿄), WAITINGROOM(2024, 2023, 2020, 도쿄), COHJU contemporary art(2022, 교토)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후쿠오카시미술관(2024, 후쿠오카), 도쿄도현대미술관(2024, 도쿄), 교토문화박물관(2024, 교토) 등에서 단체전에 참여했다. 시가현립미술관과 다카하시 류타로 컬렉션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까떼고리》
2026/9/22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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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떼고리는 김나현, 박경빈, 이지은의 3인전 《까떼고리》를 개최한다. 세 작가는 어떤 사물이 바로 그 사물이게끔 하는 조건을 흔든다. 그리고 그 조건이 흔들린 이후에 대해 어느 정도씩 상상하게 한다. 효력 잃은 문서는 허물을 벗고, 깨진 유리는 비행을 하며, 뒤집힌 바구니는 공간을 기울어뜨린다.
김나현의 〈만료된 재류자격증명서〉는 해외 체류를 위해 발급받았던 문서를 얇은 아크릴 수지에 전사한 결과물이다. 법무성 직인이 찍힌 행정 문서는 배달 식품을 싸는 비닐 껍질처럼 구겨지고 눌러붙어서, 활자와 QR 코드는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문서를 소지한 자의 권리를 더 이상 보증하지 못하게 된 서류의 무력함이 아니라, 체류나 이동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이처럼 얇고 덧없는 막에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손에 쥐면 곧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이 젤라틴질의 표면은 행정적 효력을 잃는 대신, 또 다른 힘, 이를테면 부력의 작용을 받는다. 그것은 더 이상 경계를 열거나 닫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경계 없는 공간을 떠다니듯 부유하는 것이다.
박경빈의 〈이카루스〉는 파손된 강화유리를 그대로 펼쳐 놓은 것처럼 보인다. 작품의 제목은 이 충돌의 정황을 신화 속 비행의 서사와 겹쳐 읽게 하는데, 특히 유리 파편이 ‘밀랍’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밀랍은 오래 전부터 균열을 메우거나 조각을 붙이는 데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작가의 관심은 깨진 유리를 복원하는 데 있다기보다, 봉합에 의해 균열이 지속되고 가시화되는 일종의 역설을 향해 있는 듯 하다. 밀랍으로 접합된 유리판은 견고해 보이지만,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언제든 다시 흩어져버릴 수 있는, 조건적이고 위태로운 상태이다. 여기서 밀랍은 추락을 교훈적으로 봉합한다거나, 추락 이전의 상태를 복원하지 않고, 추락 이후의 또 다른 비행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 독특한 의미가 있다.
이지은은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라탄바구니를 브론즈로 주조했다. 이른바 ‘기념비 조각’의 전통과 밀접한 재료인 브론즈는 역사나 기억을 고정하는 재료로 사용되어 왔지만, 〈Halber Korb〉에서 작가가 기리는 것은 말 탄 영웅이나 우뚝 선 위인이 아니고, 바닥에 엎어진 바구니다. 작품은 바구니의 익숙한 외양을 취하고 있음에도, 지나치게 무겁고, 반쪽만 남아 있으며, 사물을 담을 수 없게 뒤집혀 있다는 점에서 '바구니다움'을 이루는 조건들로부터 몇 발짝 벗어나 있다. 전시장의 벽과 바닥이 직각으로 만나는 지점에 밀착된 브론즈 바구니는 사물을 담는 용기에서, 공간을 뜻밖의 방식으로 읽게 하는 새로운 참조점으로 전환된다.
김나현(b.2001)은 서울대학교에서 회화와 인류학을 공부했고,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있다. 서보아트스페이스 (2026, 서울), 홍대 상상마당 (2024, 서울)에서 단체전을 가졌다. 관악문화재단 청년 작가 지원사업 (2026), 서보미술문화재단 창작지원금 (2026), 하동철 창작지원상 (2025) 등에 선정되었다.
박경빈(b.1999)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조형예술과 예술사 과정을, 서울대학교에서 조소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온수공간 (2025, 서울), COSO (2024, 서울), 아트스페이스3 (2022, 서울) 등에 참여하였고, 주요 소장처로는 머니투데이, 대만 MUZI Art Gallery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미술아카데미가 있다.
이지은(b.1984)은 국민대학교, 브레멘 예술대학교, 뒤셀도르프 예술대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CICA 뮤지엄 (2026, 김포), 크비텐바움 갤러리 (2023, 뮌헨), 비젠바흐 갤러리 (2019, 쾰른) 등이 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비젠바흐 갤러리(2024, 쾰른), 뒤셀도르프 쿤스트할레(2017, 뒤셀도르프) 등이 있다. 2015년 DAAD 매칭펀드 장학생으로 선정되었고, Jaron&Amann GmbH, 21PS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